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던 시절, 저는 스스로를 '이름 없는 사범 1'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을 보고 나서 그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번호로 불리고, 죽어도 교체되고, 그래도 시스템은 멈추지 않는 이야기. 이 영화가 단순한 SF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소모품이 된 노동자, 익스팬더블의 세계관
혹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감각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태권도 도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지도자로서 아이들과 호흡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수업은 없었고, 제게 남은 건 안전 보조와 행정 뒷바라지였습니다. 제가 빠져도 시스템은 그냥 돌아갔을 겁니다.
《미키 17》의 주인공 미키 반즈가 딱 그 처지입니다. 그는 익스팬더블(Expendable)로 지원하는데, 여기서 익스팬더블이란 신체를 무한 복제하며 위험한 임무에 반복 투입되는 소모품 인력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죽어도 되는 사람이자, 죽어야만 존재 가치가 생기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미키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지구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빚 때문이라는 설정은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습니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소모품으로 내던지는 현실을 SF라는 극단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니까요.
미키가 죽을 때마다 새로운 버전이 프린트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무례합니다. 케이블에 발이 걸리고, 받침대도 없어서 몸이 그냥 떨어집니다. 이 연출은 디스토피아적 미래(dystopian future), 즉 기술이 발달했어도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를 시각화한 장치입니다. 죽음이 일상이 된 미키가 감정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제가 도장에서 느꼈던 무력감과 닮아 있었습니다. 고통이 반복되면 결국 고통에 무감각해진다는 것, 그게 시스템이 원하는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요.
SF 영화에서 복제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이 영화가 선택한 건 철학적 탐구보다는 사회 구조 비판에 가깝습니다. 그 선택이 취향을 탈 수 있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 선택이 봉준호답다고 느꼈습니다.
계급 풍자의 설계, 독재자와 노동자 사이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봉준호는 계급 풍자를 어떻게 설계했을까요? 가장 많이 튜닝된 인물은 마크 러팔로가 연기하는 케네스 마샬입니다. 그는 전직 국회의원 출신으로 식민지 탐사대를 이끄는 독재자인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악한 권력자'가 아니라, 기초 과학도 모르고 우월한 인간이라는 개념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는 멍청한 독재자로 묘사되거든요.
풍자(satire)란 특정 대상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비틀어 비판하는 문학적·영화적 기법입니다. 봉준호는 마샬이라는 인물에 이 기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적용합니다. 토니 콜레트가 연기하는 배우자 일파 역시 허영과 사치로 가득한 인물로, 둘이 함께 터무니없는 언행을 반복하며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만들어냅니다. 이 묘사 방식은 일반적으로 캐릭터가 피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독재자 주변 인물들이 나사가 빠진 듯 그려지는 건 서사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이 인간을 어떻게 도구화하고 무지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도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NPC(Non-Player Character), 즉 게임에서 자율적 판단 없이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는 캐릭터처럼 묘사된 승무원들과 연구원들은, 그 평면성 자체가 이 디스토피아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계급 비판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익스팬더블 제도: 경제적 약자가 자신을 소모품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구조
- 성행위 전면 금지법: 개인의 신체와 욕망까지 통제하려는 권위주의
- 멀티플 금지: 자아의 복수 공존을 범죄로 규정하는 획일성 강요
- 크리퍼 섬멸 명령: 정보 없이 내리는 결정이 초래하는 타자 혐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나샤와 카이라는 두 여성 캐릭터입니다. 이 둘은 영화 안에서 가장 정상적이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로,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축을 담당합니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의 전작인 《기생충》이나 《설국열차》에서도 반복되는 패턴인데, 계급 구조에 균열을 내는 에너지가 언제나 시스템 바깥에서 온다는 점입니다. 계급 간 불평등이 노동자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을 '대체 가능한 존재'로 인식하는 노동자일수록 저항보다 체념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미키라는 캐릭터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시작해 결말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재미입니다.
봉준호식 각색, 상업성과 예술 사이의 줄타기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억 5천만 달러짜리 블록버스터에서 봉준호 특유의 냉소적 풍자를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저는 원작 소설인 에드워드 애쉬턴의 《Mickey7》을 읽은 상태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원작의 제목이 '미키 세븐'인데 영화는 '미키 세븐틴'으로 넘버링을 더 얹은 것부터, 봉준호의 각색이 얼마나 과감한지가 보입니다. 원작에서 익스팬더블은 처음부터 인격체로 대우받지만, 영화에서는 인격체 취급을 박탈당한 존재가 결국 인격체로 인정받는 과정 자체가 서사의 중심이 됩니다.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각색(adaptation)이란 원작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매체나 감독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창작 과정을 의미합니다. 봉준호는 여기서 원작의 SF 외연만 빌리고, 나머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독립적으로 채웠습니다. 제가 직접 두 작품을 비교해보니, 겹치는 설정보다 다른 지점이 훨씬 많았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배우 선택도 흥미롭습니다.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유명한 그가, 죽음에 달관했지만 고통에는 취약한 미키를 연기할 때 묘한 설득력이 생깁니다. 미키가 크리퍼에게 "통째로 삼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죽음에 무감각해진 것과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 공존하는 복잡한 내면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제 경험상, 시스템에 오래 짓눌리면 죽음 같은 큰 공포보다 매일의 작은 모멸감이 더 힘들어집니다. 그 감각을 미키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북미 개봉 전 기준으로 로튼토마토 신선도 88%, 메타스코어 75점을 기록했는데, 메타스코어란 여러 전문 비평지의 점수를 가중 평균한 지표로 비평가들의 종합적인 평가를 반영합니다(출처: Metacritic). 평단의 반응은 우호적이지만, 관객 점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는 비평과 관객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미키 17과 미키 18이라는 두 존재의 공존, 즉 멀티플(multiple) 상태는 자아의 유일성이라는 질문을 연대라는 사회적 언어로 전환합니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공포를 넘어, 똑같이 착취당하는 존재끼리 손을 잡는 결말. 봉준호가 보여주는 희망은 언제나 이런 방식입니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SF적 잠재력보다 계급 풍자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중 덕분에 봉준호의 메시지는 흔들림 없이 도달합니다.
이 영화를 볼 계획이라면, 우주 스펙터클보다는 독재자 옆에 앉아 함께 킬킬거리는 마음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미키가 번호로 불릴 때마다 한 번씩 자신의 이름을 떠올려보시면, 이 영화가 왜 SF를 빌린 것인지 더 선명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저는 그 순간이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