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불편해질 줄 몰랐습니다. 재판 장면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거든요. 단체 생활 중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추궁받았던 그날, 주변 사람들은 진실을 확인하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때의 막막함이 영화 속 법정과 겹쳐 보이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확증 편향, 법정에서 가장 위험한 적
영화 속 검사는 피고인들이 이른바 '불온 서적'을 읽고 반정부 선전물을 작성했다며 자술서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그런데 그 자술서가 강요와 폭행으로 작성되었다는 피고인의 주장, 그리고 변호인이 직접 지목한 피고인 몸의 멍 자국은 법정에서 처음부터 묵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여기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이 이미 내린 결론에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 증거는 무시하거나 축소하려는 인지적 편향을 말합니다. 수사기관이 '이 사람은 간첩이다'라고 결론 내린 순간, 이후의 모든 행위는 그 결론을 채우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누군가의 오해가 한번 굳어지면 그 이후에 어떤 해명을 내놓아도 오히려 변명처럼 들립니다.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이 형성된 이후에는 반론 자체가 의심의 근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법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변호인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저자가 영국 외교관이었으며 6.25 전쟁에 참전한 우방국 소속이었다는 영국 대사관 전문까지 제시했는데도, 검찰 측 증인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편향이 작동하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면 단 한 명의 변호인이라도 편향의 바깥에서 진실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공소 제기와 증거 능력, 무엇이 문제였나
검사의 공소 제기(公訴提起)란 수사기관이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법원에 피고인의 유죄를 판단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는 절차를 말합니다. 문제는 이 사건에서 공소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가 사실상 자술서 하나뿐이었다는 점입니다.
형사소송법상 자백의 증거 능력(證據能力)이란 그 자백이 법정에서 유죄 입증의 근거로 쓰일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의미합니다. 헌법 제12조와 형사소송법 제309조는 고문, 폭행, 협박 등 강압에 의한 자백은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변호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 것입니다.
영화 속 경찰 증인은 "국가보안법 사범은 자백에 포커스를 맞춰 수사한다"고 태연하게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가장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자백 중심 수사 관행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당사자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공안 사건 다수에서 불법 구금과 가혹 행위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피고인들이 읽었다는 책들은 서울대 권장도서 목록에도 포함된 서적이었습니다. 변호인은 이 책들이 불온 서적이라면 대한민국 최고 대학과 판검사 모두 불온 단체 출신이 된다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이 반박은 단순히 말재주가 아니라, 증거 능력의 부재를 정면으로 드러낸 법리적 공격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법치주의 사이의 거리
법치주의(Rule of Law)란 국가 권력이 법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며, 어떤 개인도 법 앞에 평등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쉽게 말해 권력자도 법을 어길 수 없고, 힘없는 사람도 법의 보호를 동등하게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달랐습니다. 형사소송법 제280조와 제275조 제2항은 피고인의 불필요한 포승과 수갑 사용을 제한하고 있는데, 변호인은 재판 시작과 동시에 이를 지적해야 했습니다. 이미 법정에 들어서기 전부터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경찰 증인은 국가보안법 사건은 '선 체포 후 영장'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스스럼없이 증언했는데, 이는 헌법상 영장주의(令狀主義) 원칙, 즉 체포 전에 반드시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수사 관행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단체 내 오해의 경우, 저를 몰아붙이던 사람들은 나름의 '정의감'으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더 괴로웠습니다. 영화 속 경찰 증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국가를 지킨다고 믿었겠지만, 변호인은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인용하며 그 믿음의 실체를 되묻습니다. 국민을 탄압하는 행위가 어떻게 국가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이 장면을 보며 저는 법이 방패가 아닌 창으로 쓰일 때 평범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무죄 판결을 향한 변호인의 분투가 주는 교훈
영화 속 변호인은 국가보안법 사건이 처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피고인들이 무죄라고 믿으며,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것이 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제가 이 대사에서 멈칫했던 이유는, 그 확신이 경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문제 구조는 반복됩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자백 편중, 피의자 인권 보호의 공백, 여론에 의해 유죄가 기정사실화되는 현상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자백 의존 수사 관행은 허위 자백과 오판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변호인이 법정에서 홀로 맞선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압에 의한 자술서의 증거 능력 부인
- 불법 구금과 포승·수갑 사용에 대한 절차적 이의 제기
- '불온 서적'으로 분류된 서적들의 실제 유통 현황 반증
- 영장주의 위반 수사 관행에 대한 정면 비판
이 목록은 그 자체로 당시 법치주의가 얼마나 허술하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목록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떠올립니다. 만약 내가 저 법정에 서야 했다면, 과연 나를 위해 이 목록을 하나하나 들고 싸워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그 질문이 서늘했던 만큼, 저는 제 주변의 억울한 사람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니라, 진실을 확인하기 전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고, 가장 중요한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조언이 아닙니다.